운동의 전선은 ‘생명’과 ‘반생명’ 사이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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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의 전선은 ‘생명’과 ‘반생명’ 사이에 있어야 한다>
운동의 전선은 마땅히 생명과 반생명의 처절한 경계선에 그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전선은 왜 자꾸만 그 외곽을 맴도는가. 가장 다급한 곳, 가장 아픈 곳, 가장 먼저 사람이 쓰러지는 곳이 아니라 말을 만들기 적당한곳, 구호를 조직하기 쉬운 곳, 사업과 예산의 언어로 번역하기 매끈한 곳으로 자꾸만 밀려나고 있다.
토마스 사스는 저서 "정신병의 신화"에서 정신질환을 실체적 질병이라기보다 사회적 규범과 권력의 문제로 보았다. 그의 비판은 정신의학이 사람을 분류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날카롭게 폭로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정신의학은 역사적으로 늘 선하지 않았고, 국가와 가족과 제도가 손을 잡을 때 얼마든지 인간의 자유를 난도질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정신질환이 오직 사회적 낙인의 산물이라고만 말하는 순간, 당사자가 겪는 ‘급성기의 지옥’은 설명되지 않는다.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사람이 자기 몸 하나 지키지 못해 허물어지는 그 칠흑 같은 시간은 화려한 담론만으로 건널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이름 붙이기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죽고 사는 사생결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당사자운동은 선택해야 한다. 의학의 폭력을 비판하는 구경꾼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폭력을 부수면서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체계’까지 강력히 요구할 것인가.
나는 단호히 후자여야 한다고 믿는다. 운동은 단순히 의료를 증오하고 거부하는 자리에만 서서는 안 된다. 운동은 반생명적 치료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치료, 존엄을 파괴하지 않는 응급, 사람을 짐짝처럼 다루지 않는 이송, 감금이 아니라 회복을 목표로 하는 입원, 그리고 퇴원 이후 다시 삶으로 연결되는 철저한 지원체계를 요구하는 투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괴한 일이 벌어진다. 의료모델을 비판하면서 정작 응급실 밖에서 죽어가는 당사자의 공백은 방치하게 되고, 강제의 폭력을 논하면서 위기 당사자의 죽음에는 침묵하게 된다. 회복을 말하면서도 가장 깊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우리네 '운동의 언어' 바깥으로 밀려나 버린다.
전선은 원래 가장 뜨거운 곳에 있어야 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곳, 가족이 무너지는 곳, 응급실 문턱에서 거절당하는 곳, 경찰과 보호자와 사설 이송단 사이에서 한 인간의 존엄이 갈기갈기 찢기는 그 비참한 길바닥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많은 운동은 그 전선을 너무 쉽게 상징의 자리로 바꾸어 버린다. 생명의 문제를 구조의 문제로 끝내고, 구조의 문제를 다시 사업의 문제로 축소한다. 그러는 사이 정작 가장 위급한 당사자들은 늘 외곽에 남겨진다.
토마스 사스가 본 것은 정신의학이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오늘 더 보아야 하는 것은 권력 비판만으로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신의학의 신화를 해체하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 죽지 않게 하는 체계, 존엄을 잃지 않게 하는 치료, 당사자가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조건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운동의 전선은 '의료 대 반의료'의 싸움이어서는 안 된다. '복지 대 병원'의 싸움이어도 안 된다. 전선은 오직 생명과 반생명 사이에 있어야 한다. 당사자주의는 당사자의 생명과 인권의 중심에 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다시 삶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무엇인가. 운동이 이 질문 위에 서지 못한다면, 그 운동은 결국 사람보다 자기 언어를 지키는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게 된다.
나는,우리는 정말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이념의 편인가, 구조의 편인가, 조직의 편인가. 아니면 증상의 한복판에서 홀로 떨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생명 편인가.
작성: 파도손대표 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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